언론속의 강태진
평등민주주의가 만개한 대가를 치르는 중일까. 민주주의다, 선거다, 투표다, 거버넌스다 하며 국민 모두가 세대 간 격차 없이 함께 나랏일에 힘을 합쳐야 하는 당위적 명제는 옳으나, 그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양보정신이 더불어 내면화되어 있는지, 민주주의의 또 다른 본질인 `경쟁의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 현재와 같은 대립 구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지, 선거 때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이다.
선거철이면 후보자들은 지하철역이나 행사장 등 대중이 모이는 곳에서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배포하며 홍보에 나선다. 패기 넘치는 젊은 후보이든 백발의 연륜이 묻어나는 지도자급 후보이든 유권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한 표를 부탁한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형상 모습 그대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인 이유는 국민 각 계층이 평소의 욕구와 기대를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선거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민의 미성숙한 모습이다. 특히 세대 간 표현의 차이는 시민 간 간극을 키우며 서로를 실망시킨다.
거기에 젊은 층들의 태도가 기본 예의규범을 거스른 경우가 많다. 악수를 건네는 백발의 후보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고 지나치는 젊은이의 모습이나 지하철 역사 주변에 버려져 오가는 사람의 발에 짓밟히는 후보자들의 명함은 국민의 성숙과 도덕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요즘은 앳된 학생이 담배를 피워도 나무라는 어른이 없다. 신세대가 예의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며, 주변에 이들을 꾸짖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가정, 학교, 사회 전반으로 인성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에는 기성세대가 존경받을 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자신의 앞가림에만 급급한 보수에 대한 진보의 응징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나라 전체의 분위기를 자성과 변화의 축에 놓을 시점이 되지 않았는가? 그 축의 근저에 엄부모가 자리 잡아야 한다. 권위적이던 조선시대의 엄부가 아닌, 평범하지만 근엄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금 등장할 시대가 열려야 한다.
미국의 댄 퀘일 부통령이 1992년에 아버지의 중요성을 폄하한 TV 시리즈를 비난하며 가정에서 자리를 잃은 아버지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적이 있다. 블랜큰혼은 저서 `아버지 없는 미국(Fatherless America)`에서 1996년 당시 미국 가정의 40%가 편모가정임을 우려하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미국 사회의 청소년 폭력과 미혼모 문제 등을 지적했다. 여러 연구가 인종과 빈곤을 포함한 다른 어떤 사회적 변수보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장 큰 범죄의 요인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렇듯 가정에서는 물론 사회에서도 엄부는 기강과 도덕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엄부 가장이 사라진 듯하다. 엄부가 사라진 데에는 기성세대의 책임이 없지 않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 역시 청문회 같은 진입장벽을 거치며 권위는 망가져 존경의 염을 날려버리고 만다. 오늘의 일부 지도자들에게서는 사회질서의 바탕이 되는 선비정신이나 공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세상이 변하면서 가치가 다양해졌다. 이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 공존의 지혜를 짜야 할 때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사회적 성공과 부의 축적이라는 단순한 물신주의적 가치만을 추구해온 기성세대들도 편승해야 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표현대로 인간은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haticus-공감하는 인간)이지 않은가?
또다시 선거철이다. 후보자도 유권자도 자신의 부족함부터 헤아리는 가운데 내 주장이 과연 공익을 위함인지 되돌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유권자로서 머리 숙여 국민에게 봉사할 기회를 부탁하는 후보자의 손을 한 번쯤은 따뜻하게 맞잡아준다면 그가 성심껏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지 않을까?
[강태진 객원논설위원ㆍ서울대 공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