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강태진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에 따른 생활 영역 확대와 산업화에 의해 지구 오염을 수반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의 웰빙과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어, 21세기의 전 지구적 화두로 자리매김하였다.
오염되고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느린 삶을 표방하는 이탈리아의 `치타슬로` 운동이라든지,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고 환경보전을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하는 영국의 `다운시프트`족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웰빙의 역기능인 상업성과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이면서도 친환경적인 소비패턴을 지향한다는 `로하스`족도 이미 5~6년 전부터 출현하였다. 니어링 부부 예가 여기에 속한다. 이처럼 종전의 과학기술이 `빠름의 미학` `물질의 미학` 등으로 표현된다면, 웰빙은 `느림의 미학` `감성의 미학` 등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 특히 생산기술 발달과 이로 인한 도시화가 환경오염의 주범이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멀어질수록 웰빙을 더욱 잘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미국 인디애나나 펜실베이니아의 아미시인들의 삶을 살펴보자. 관점이 다르겠지만, 현대 기술과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아미시들의 삶이 과연 진정한 웰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인간과 지구를 위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으로 개발하는 것이 진정한 웰빙의 실현이며, 이는 고도의 과학기술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웰빙과 과학기술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관계가 아니다.
기술 자체를 위한 기술의 개발이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인간을 생각하는 인간 중심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하여 진정한 의미의 웰빙과 함께 문명생활의 이기를 조화롭게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교수를 지낸 존 홀드렌은 과학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지속가능한 웰빙`의 개념을 3단계로 구체화하였다.
그 첫 단계인 `발전`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경제적 부분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및 환경 등 모든 측면에서 개선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다음 단계인 `지속가능 발전`이란 개선된 상황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인 `지속가능 웰빙`은 웰빙을 유지 확대하기 위한 지속가능 성장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웰빙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유지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러한 점에서 과학기술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성장의 한계`를 분명히 밝혔던 1970년대 `로마 클럽`의 입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생산성은 높이되, 환경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농업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인류의 기아문제 해결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수질과 대기 오염도와 이산화탄소 발생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활용 가능한 과학기술의 확보가 선결되어야 한다.
그 밖에 태양열이나 풍력 발전에 근거한 녹생성장 추진이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각종 생명과학 기술 등 인간의 웰빙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과학기술의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스마트한 옷이 착용자의 바이오 리듬과 건강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진단함으로써 질병과 사고를 예방하고, 음악을 들려주는 등 감성적인 역할로 인간을 즐겁게도 해줄 수 있다. 이는 모두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20세기까지 `지배의 리비도`에 근거한 과학주의로는 안 되고 21세기 인지문명이 주도하는 `감성의 리비도`를 근거로 메타과학주의 입장에 설 때 `행복의 지도`(에릭 와이너)를 새롭게 그려보면서 웰빙이 지속적으로 의미 있고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강태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