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진
언론속의 강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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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바랜 평등주의 교육
[매일경제] 2006.03.29

60년대 유럽을 휩쓸었던 사회주의의 거센 바람은 영국 교육계에도 예외 없이 불어 닥쳤다. 중세 이후 수 세기 동안 엘리트 교육 방식을 중시해온 영국이 유구한 역사적 전통 대신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교육 평등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영국은 학생 능력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기보다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교육 방식으로 전국 학생들을 동일한 수준으로 교육했다. 이 때문에 능력별 선택적 교육 정책은 사라지고, 획일적ㆍ일괄적 교육이 관련 정책의 최우선 명제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영국 교육계에는 과거로 복귀하려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른바 학문적 엘리티즘(academic elitism)으로 불리는 수월(秀越) 교 육의 대두가 바로 그것이다.

영국 정부가 과거의 수월 교육 방식을 다시 끄집어 낸 데는 남 모를 고육책이 담겨 있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교육 평등주의가 결과적으로 모든 대학의 평균 교육 수준은 향상시켰으나 우수한 인재의 수월교육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고 대학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지난 4반세기 동안 나날이 발전하는 미국의 하버드와 브라운, 스탠퍼드대학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세계 최고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특히 자연과학에 서의 위상 하락은 더욱 심각했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자연계 교육기관들이 배출한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20%에 달했다. 하지만 이 같은 비율은 갈수록 줄어들어 오늘날에 이르러서 는 70년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0% 이하로 급격히 하락하고 말았다.

반면 일찍 부터 수월 교육주의를 표방하며 교육 자원의 선택과 집중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미 국은 현재 전체 수상자 가운데 7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노벨상을 독식하며 교육 초 강대국이 돼버렸다.

문제는 위에서와 같은 수월교육으로의 회귀가 비단 영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 라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간 교육 평등주의를 실험했던 일본 역시 교육기관 수준 에 따라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차등적으로 지원, 배분하는 수월교육으로 회귀하고 있으며 상당수 유럽 국가도 뒤늦게 영국 뒤를 밟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수월교육주의만이 능사라는 섣부른 결론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칫 잘못된 제도의 도입은 학생, 교육기관, 국민간의 위화감을 심화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교육 평등주의와 수월교육 양쪽이 갖는 장 점과 단점을 적절히 혼합할 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은 아직까지 평등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우수한 학생이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과거 한국 야구는 뛰어난 가능성과 무궁무진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늘 세계의 변 방 취급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열악한 야구장 시설과 구단의 인식 부족에 따른 낮 은 지원은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원천적으로 봉쇄된 국외 진출 역시 보다 수준 높은 일류 선수의 탄생을 근본적으로 가로막았다. 대표 감독과 선 수 인선을 둘러싸며 반복적으로 되풀이됐던 잡음도 경기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보여준 4강의 기적은 이 모든 과거의 관행과 불합리한 제도를 타파한 데서 온 필연적인 결과에 불과했다. 지도자가 선수 선발과 기용, 전략과 전술에 관한 전적인 책임과 권한을 가질 수 있었고, 관련 단체의 압력이나 외부 청탁으로부터 자유로워 그들만의 자율적인 통솔 방식을 고수해 끌고 갈 수 있었다.

평등이나 균형 발전도 필요하지만 세계적 성과, 세계적 수준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 는 우수 인재 선발과 인프라스트럭처 투자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 선발, 교수 초빙과 교육 인프라스트럭처 투자에서 한국의 대학 교육이 처한 현실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그 동안 한국 교육계는 셀 수 없이 많은 개혁과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담당 공무원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입시 제도의 변화, 고교 평준화와 비평준화 사이에서의 저울질 속에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실험을 경험했다.

그러나 대학 교육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지향하려면 이 같은 실험은 이제 과감하게 정리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최영미 시인의 말은 그래서 더욱 시사하는 바 크다.

우수한 개별 구성원, 자율성과 신뢰가 확보된 시스템, 그 속에서 발휘되는 탁월한 지도력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백년대계인 대학 교육에서 어쩌면 더 절실하다. 세계 4강 신화는 비단 스포츠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 테니까.

[강태진 서울대 공대 교수]